드라마 이산으로 인해 요즘 정조에 대한 관심이 크다. 아마도 조선이 구한말 일제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고 개혁을 통해 강국으로 성장 할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회한과 아쉬움이 큰 탓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통해 잠시 정조의 마지막 한 달을 살펴보고자 한다..
정조 54권,(1800년) 24년 6월 14일 1번째기사
상이 이달 초열흘 전부터 종기가 나 붙이는 약을 계속 올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효과가 없으므로 내의원 제조 서용보(徐龍輔)를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정조 24년 6월 18일
진찰을 받으라는 약원의 청을 물리치다.
정조 54권, 24년 6월 19일 경오
1번째기사직숙을 간청하는 약원의 청을 받아 들이지 않다
정조 54권, 24년 6월 26일 정축 2번째기사
약원 제신들이 원기를 보충할 탕약을 권했으나 임금은 유보시키다.
정조 54권, 24년( 1800 경신 / 청 가경(嘉慶) 5년) 6월 26일 정축 3번째기사
약원 제신을 접견한 뒤 경옥고를 들다.
“열기운이 아직도 내리지 않았다.”하니, 시수가 아뢰기를,“조금 전 연훈방을 시험해본 뒤에 심연과 여러 의관이 하는 말은 모두 종기 부위가 어제보다 눈에 뛰게 좋아져 며칠 가지 않아 나머지 독도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신들은 그말을 듣고 너무도 경사롭고 다행스러웠습니다.”하고, 상이 이르기를,“그말이 사실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의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 연석에서 진찰할 때 신들이 본 것으로도 어제보다 매우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염려할 것이 없으나 주무시는 것과 수라를 드시는 일이 아직 정상을 회복하지 못하여 가장 애가 탑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탕약의 일로 경들이 누누이 애써 간청하니 그 또한 계속 거절하기 어렵다. 생맥산을 먹어보긴 해야겠으나 우선 경옥고를 조금 시험하고 싶다.”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신들이 처음부터 경옥고를 드실 것을 청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으므로 생맥산을 드실 것을 청했던 것인데, 이제 그것을 복용하신다는 분부가 계시니 실로 천만 다행입니다.”
하고, 윤대(允大)는 아뢰기를,“이 약은 인삼 재료가 들어가긴 했으나 지황(地黃)의 양을 배로 늘렸기 때문에 양제(凉劑)라고 말할 수 있으며 체질이 본디 차가운 자는 복용할 수가 없습니다.”하고 나서 경옥고를 올려드렸다.
정조 54권, 24년( 1800 경신 ) 6월 27일 무인 1번째기사
정신이 혼미한 증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탕약을 올리다(경옥고 때문에 혼미해졌을까? 인삼은 원래 열이 많은 재료다. 열이 갑자기 오를 수도 있고, 종기의 균이 전신으로 퍼지는 폐혈증이 유발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종기의 상태가 좋아졌다고 한지 하루만에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경옥고에 독을 탓을 가능성도?)
정조 54권, 24년( 1800 경신 ) 6월 28일
기묘 4번째기사승지 한치응을 체직하고 김조순을 그 후임으로 삼다(김조순 이사람이 훗날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열고 후손 대대로 조선을 말아먹는다.)
정조 54권, 24년( 1800 경신 ) 6월 28일 기묘 5번째기사
상이 무슨 분부가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들어보니 ‘수정전(壽靜殿)’ 세 자였는데 수정전은 왕대비(王大妃)가 거처하는 곳이다. 마침내 더이상 말을 하지 못하므로 신하들이 큰소리로 신들이 들어왔다고 아뢰었으나 상은 대답이 없었다.(의식을 잃기 전 정순 왕후를 왜 찾았을까? )
정조 54권, 24년( 1800 경신 ) 6월 28일 기묘 7번째기사
왕대비의 분부에 따라 성향정기산 등을 올렸으나 회복하지 못하다(이때 독을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병증이 위독한 상태)
“이번 주상의 병세는 선조(先朝) 병술년7474) 의 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 드셨던 탕약을 자세히 상고하여 써야 할 일이나 그때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복용하고 효과를 보았으니 의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올려드리게 하시오.”하자, 도제조 이시수가 명길로 하여금 성향정기산을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다. 혜경궁(惠慶宮)이 승전색을 통해 분부하기를,“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하므로 환지 등이 물러가 문 밖에서 기다렸다. 조금 뒤에 환지 등이 문 밖 가까이 다가가 큰소리로 신들이 이제 들어가겠다고 이뢰었다. 자궁(慈宮)이 대내로 들어가자 환지 등이 다시 들어왔다. 부제조 조윤대(曺允大)가 성향정기산을 받들고 들어오자 시수가 받들어 올리면서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두세 숟갈을 입안에 넣었는데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토해내기도 하였다. 다시 또 인삼차와 청심원을 계속 올려드렸으나 상은 마시지 못했다. 시수가 또 명길에게 진맥하게 하였는데 명길이 진맥을 한 뒤에 물러나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하자, 제신이 모두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정조 54권, 24년( 1800 경신 / 청 가경(嘉慶) 5년) 6월 28일 기묘
11번째기사
유시에 임금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다
조선시대 왕이나 양반들은 식습관 때문인지 지금의 당뇨병에 많이 걸린듯 보인다. 조선시대 기록들을 보면 당뇨에 의한 병증은 주로 구갈증(입마르는 증상)과 몸에 종기 발생시 잘 아물지 않은 증상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도 예외가 아닌 듯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몸에 종기가 발생 잘 아물지 않는 증상을 보인다. 의학적 지식이 풍부했던 정조는 종기 초기에는 가급적 자신이 병을 치료하고자 한 듯 보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증상이 심해져 의원들의 진찰을 받게 된다.그리고 때론 자신이 직접 처방을 하기도 했다.
그럼 과연 정조는 독살 되었을까? 조선 왕조 실록 기록만을 두고 보면, 몸에 종기가 퍼지는 상황에서 정조가 자신이 직접 처방을 한 것으로 볼때 (의학적 지식이 아무리 해박하여도 실제 환자 치료 경험이 있는 의원들 보다는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초기에 치료 시기를 놓쳤을 수도 있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 특히 당뇨병과 같이 감염성 질환에 취약한 경우 초기에 병증을 잡지 못하면 한 두달 사이에 화농이 급속히 퍼지면서 폐혈증과 같은 합병증으로 사망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정조가 처음엔 종기로 시달리다 점차 고열 증세를 보인 것으로 보여 병증의 악화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왕조실록 기록만으로 정조의 독살을 논하기에는 병증의 급속한 진행이 더 논리적으로 보인다. 항생제만 있었어도 정조는 쉽게 회복이 되었으리.....
그러나 정조가 노론 시파와 맞서고 있던 당시 정치상황을 고려해볼때 독살 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 할 수 는 없으리라본다. 더구나 정조의 마지막 임종을 홀로 지켰던 정조 최대의 정적 정순왕후는 정조가 승하 하자마자 수렴청정을 하며 기다렸다는 듯이 개혁파의 군사적 기반인 장용영을 혁파하고 천주교를 핍박하며 정조의 모든 개혁정책을 원상태로 되돌린다. 이러한 정황이 정순 왕후를 필두로 한 노론 세력이 정조를 독살 했을 것이라는 의문에 가장 근접해 보인다.
하지만 역사는 되돌릴 수 없고 그 당시 정확한 사실은 그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조가 영조처럼 좀 더 오랜기간(정순왕후 사후까지 11년만 더...) 집권하면서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이루었다면 하는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CUL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교동도에서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0) | 2007/12/04 |
|---|---|
| 태왕사신기를 기다리며...'쥬신'이란 무엇인가? (0) | 2007/11/21 |
| 정조는 정말 독살 되었을까? (2) | 2007/11/15 |
| 이산의 비, 효의왕후와 의빈성씨 (0) | 2007/11/05 |
| [Travel Info] Nami Island (0) | 2007/11/02 |
| [사진한 장의 에세이]분당(Bundang) 어느 초가을의 기억 (0) | 2007/11/01 |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이올린에 추천하기

